| 현재위치 : 홈 > 사이버추모
불멸의이름-진성일
사이버 분향소
이곳에 우리와 함께










불멸의 이름 진성일  




 
1964년 1월 26일 3남 1녀중 장남으로 출생
1982년 경성대학교(구, 부산산업대) 법정대학 행정학과 입학
1984년 군입대
1986년 행정학과 복학
1986년 11월 5일 오후 12시 43분 건국대 농성사건 해명, 군부독재 타도, 미제국주의 축출의 유서를 뿌리고 시청각관 5층(구, 문과대) 옥상에서 분신, 투신하였음
 






1986년 10월 29일 오후 3시20분경 서울 건국대에서 "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 연합" 발족식 도중 정?후문에서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쏘면서 진압하는 전경에 밀려 학생들 대부분이 본관, 중앙도서관, 사회과학관 등에 고립되었다. 이에 고학번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구성하고 이러한 진압이 단순한 시위해산차원이 아니라 철야농성을 유도해 냄으로써 애학투련에 참가한 유학생들을 용공조작과 폭력행위로 매도하여 대대적인 언론전으로 민족민주세력 탄압의 명분을 조장하려는 음모로 규정, 전투원칙과 생활수칙등을 설정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게 된다. 계속된 농성 속에서 나타나는 추위와 굶주림을 동지에 대한 사랑과 믿음으로 이겨내며 투쟁하였으나, 10월31일 오전 8시 40분경 헬기가 나타난 것을 시작으로 한시간 동안의 무차별적인 공권력의 무력진압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강제 진압되었다.

이에 격분한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이 건국대 폭력 진압 규탄과 독재타도를 외치며 투쟁하였으나, 경성대(당시 부산산업대)총학생회는 어떠한 입장표명과 실천 없이 건국대 항쟁 기간 중에 대동제를 진행하였다. 10월31일 건국대 상황이 학교로 전해지자 20여명의 학생들이 총학생회 사무실을 찾아가 총학생회장과의 대화를 통해 총학생회측의 입장 표명을 요구하였으나 오히려 총학생회 간부들로부터 폭행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학내 상황 속에서 진성일 열사는 학창 초기부터 가져온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대학인의 사회적 역할 등의 고민과 맞물려 자신이 해야할 일을 고민하였고, 11월3일 재부대학 동래고 연합동문회에 참석한 진성일 열사는 지니고 있던 목걸이와 볼펜 등을 친구들에게 나눠줬으며, 이틀 뒤인 11월5일 오전9시 경성대 법정대 식당과 상경대 뒷산에서 친구 2명과 함께 11시30분 경까지 건국대 농성투쟁과 대학인의 역할 등에 다소 추상적인 의견을 나누고 헤어진 뒤 1시간 후인 12시 43분경 시청각관(구, 문과대) 5층 옥상에 나타나 준비해온 유인물 10여장을 뿌린 후 온몸에 불을 붙인 채 투신하였다.




20분 뒤 진성일 열사는 앰블런스에 실려 나가고 학생회관 앞에는 유서 내용을 쓴 대자보가 나붙고 2시경 학생회관 앞에 모인 약 300여명의 학생들이 농구대와 축구골대를 밀고 시위를 전개하자 전경들은 사과탄과 최루탄을 대량으로 쏘며 저지하였다. 4시20분, 시위를 끝내고 약 70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앞으로의 행동방향에 대해 벌어진 토론속에서 1주일간의 수업거부와 철야농성등의 의견이 나와 즉석에서 농성 지도부를 뽑고 철야농성을 결의하였다. 이어 4시 30분 경부터 있었던 비상운영위원회의 4개항에 이르는 ‘6개 단대장 결의문’을 문과대 학생회장이 낭독한 후 5시경 철야농성을 위해 약 40여명이 도서관으로 들어가 토론 등을 벌이며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6시 10분경에 6개 단대 회장들이 도서관을 찾아와 내일 투쟁을 위해 해제하기로 하고, 내일 전면 수업거부와 12시 집회를 갖기로 결정하면서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으나, 6시 30분경 학교 앞 재해병원에 안치되어있던 열사의 시신이 경찰에 의해 강탈되었고 학생들은 전원 해산 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11월6일 교문 앞에서 교직원 10여명이 나와 학생증 제시를 요구하며 타학교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아침부터 교내 곳곳에는 검은 깃과 각 단체명의의 대자보가 붙었으며 11시 30분경 시청각관 앞에 마련된 빈소에서 약 400여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분향, 제문낭독, 고인의 유서낭독 순으로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추도식이 끝나자 학생들은 스탠드로 모여들었는데 조금 뒤 최정규 총학생회장이 빈소에 분향한 뒤 스탠드로 오자 학생들은 "어용, 폭력 총학 물러가라!"고 외쳤다. 이어 진행된 1시간 동안의 토론에서 행정학과 주관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하고 대의원총회에서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였다. 1시 25분경 약1,500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총학생회신임여부를 묻는 ‘임시 비상 대의원대회‘ 를 개최하여 총대의원 96명중 69명이 출석한 가운데 찬성 62, 반대 4, 기권 2, 무효 1표로 총학의 불신임을 가결하게 되었다. 이후 '독재타도', '파쇼타도'를 외치며 1,200여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 10m 까지 내려가 부산시민들에게 2진성일 열사의 유언장을 낭독한 후, 교내를 돌며 애도의 뜻을 표하는 침묵시위를 벌인 뒤 3시 5분경 다시 교문으로 진출하여 해산을 종용하는 경찰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하자 경찰은 가스차를 교문위 약50m까지 진입시켜 가스를 분출하였다.
4시에 시청각관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비상 대의원총회’ 가 최루탄 가스로 인해 법정대 202호로 장소가 변경되어 약 52명의 대의원들이 참석하여 이남규 법학과 학생회장의 사회로 ‘장례준비위원회‘ 를 구성하고 박향권 행정학과 학생회장을 장례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한편 시위가 끝난 뒤 학생 300여명이 운동장에 모여 노래 등을 불렀으며, 열사의 빈소에는 행정학과, 동문회, 친구들이 밤새 지켰다.

11월7일에는 전날에 이어 타학교 학생들의 출입통제가 한층 강화되었고 학내 곳곳에는 사복경찰이 부쩍 늘어난 가운데서도 ‘2진성일 열사 추모비 건립’ 모금함이 등장하여 많은 학우들이 모금에 동참하였다. 오후 1시경 애도의 나팔소리와 함께 약 1,700명의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청각관 앞에서 고인의 약력소개, 추모시 낭독, 제문낭독, 분향 순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이 후 약 500여명의 장례행렬은 고인이 다니던 법정대 앞에서 5분간 머문 뒤 상경대 - 예술대 - 교문을 지나 운동장 중앙에 도착, 약 100여명의 학우들이 '아침이슬','선구자','상록수'를 부르며 3시 15분경 화장이 끝나자 장례식을 마쳤다.

장례식이 끝난 뒤 2진성일 열사의 아버님이 간단한 인사를 통해 오늘은 조용히 해산할 것을 당부하였으나, 학생들은 “성일이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라고 외쳤으며 4시경에는 "모든 사태의 책임을 운영위가 지기로 하였으며, 대의원총회를 10일 오후 1시에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운영위원회의 결정사항을 발표하자 학생들은 곧 바로 시위에 들어갈 것을 결정하였다. 4시 20분경 600여명의 학생들이 교문으로 진출하여 돌과 화염병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자 전경들은 최루탄과 소이탄을 무차별 대량 발사하여 몇 몇 학생들은 최루탄가스에 질식하여 쓰러지기도 하였다. 6시경 시위를 끝내고 내일의 투쟁을 위해 운동장에 모여 학내 전반에 관한 토론을 벌인 뒤 6시 30분경 내일 오후 1시에 ‘비상운영위원회’ 개최를 발표하고 추도의 묵념을 올린 뒤 ‘선구자’ 를 합창하며 해산하였다.

다음날 11월8일에는 부산대, 동아대, 등 5개대 총학생회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등 3개 단체의 명의로 된 건국대 항쟁과 2진성일 열사 분신에 대한 공동 성명서가 발표되었으며, 부산지역의 각 대학에서도 진상규명 및 추도식이 거행되었다. 그 이후 1996년 「민족민주열사 진성일 추모사업회」를 발족, 열사를 기리는 계승제가 해마다 이루어지고 있으며 진성일 열사가 명예졸업생으로 등록되어 있는 북한의 장철구 상업대학에서도 열사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민주동문회 소개 | 사무실 (051)-611-4651 | 메일 ksmindong@hanmail.net